[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려시대 청자는 그릇의 색깔이 청색을 띄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기법은 매우 다양하다. 첫째, 흙으로 만든 그릇의 표면을 실처럼 파서 새긴 모목새김 곧 음각(陰刻), 둘째, 무늬를 돌출하게 새긴 돋을새감 곧 양각(陽刻), 셋째, 눌러서 돌출하여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든 압출(壓出) 돋을새김. 넷째, 별도로 모양을 만들어 입체감이 나게 붙인 상형(象形), 다섯째, 흑토와 백토를 물에 개어서 그림을 그르듯 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서 구운 퇴화(堆畵)기법, 여섯째, 그릇의 꽃무늬에 붉은색을 칠하여 화려하게 한 동화(銅畵) 동채(銅彩)기법. 일곱째, 철사 물감을 그릇의 표면에 새겨넣은 철화기법(鐵畵技法), 여덟째, 청자의 바탕흙에 역상감 기법으로 백토를 넣고, 그 부분을 제외한 전체에 철분이 많은 유약인 철유(鐵釉)를 발라서 구운 철유기법(鐵釉技法)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기법으로 다양한 그릇들을 만들어낸 고려청자는 고려에서만 인정받았던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은 물론이고, 서양으로까지 흘러들어갔으며, 흙으로 구워만든 그릇 가운데 가장 귀한 그릇으로 여겨졌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아름다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흑유(검은색) 철유(붉은색)등 여러 유약을 활용하여 도자기의 빛깔을 다양하게 만들고, 그릇의 표면을 긁어내어 무늬를 새기고, 그곳에 다른 색이 나는 흙을 채워서 상감기법으로 발전한 고려청자들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전 현재 전시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2세기 고려청자는 푸른빛의 비색을 띠게 되었고, 다양한 모양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많은 그릇 중 향로와 주전자의 모양이 많은데, 향로는 투각기법이 등장하여 연기가 올라오는 모습이 더욱 신비스럽게 하였고, 주전자의 기능은 물이나 차 등 액체를 담아 잔에 따르기 위한 단순한 기능이지만, 이런 단순한 기능에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귀하게 만들 것인가를 연구한 것이 고려청자였다. 그 결과 주전자이되 물을 담는 몸통의 모양으로 다양한 자연물과 동물의 모양을 본따게 되었고, 그 결과 명품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전자에 활용한 것들로 물고기, 거북이, 오리, 원앙, 석류, 죽순 등이 있으며, 예전에 만들던 항아리를 활용한 경우 등이 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전시대에는 청동으로 만들던 것들을 고려시대에는 청자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물건을 쓰는 입장에서 보면 깨지기 쉬운 청자는 다루기도 훨씬 조심스러웠을 것이나, 만들기도 어렵고 다루기도 어려운 물건들을 굳이 청자로 만든 까닭은 귀한 곳에 쓰는 물건을 더욱 귀하게 대접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청자의 시작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청자의 기법을 더욱 발전시킨 것은 고려였다. 고려청자는 중국에서 더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의 뛰어난 손재주를 마음껏 보여주는 고려청자의 모습을 보면서, 요즈음 세계에 펼쳐지는 한국의 문화상품들이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려왕조는 성종때(981~997) 때부터 각종 의례에 대한 제도를 정비하면서 그에 쓰이는 자기들을 만들었다. 이를 위하여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펴냈다. 각종 의식을 주관하기 위하여 제기도감, 도제고 등의 관청을 설치하고 국가 의례용 그릇들을 체계적으로 만들고 관리하였다. 의례용 그릇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철(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의 동물), 용, 이룡(이무기) 등의 무늬를 장식하였고, 의식을 행할 때에는 향로에 향을 피웠는데, 이 향로도 청자로 만들었다. 연꽃문양을 돋을 새김으로 장식한 향로는 백제금동대향로를 생각하게 하는데, 백제금동대향로에서는 연꽃이 수많은 산으로 표현되었고, 그 산마다 수많은 동물들과 사람들이 표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국가적 의례가 많았는데 대표적 행사로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있었다. 이런 행사에는 다양한 그릇들이 사용되었을 것이고, 귀한 음식과 음료와 행사용 물품들은 귀한 청자에 올려졌을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문화유산 중에 그 아름다움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고려청자는 이전시대에 토기를 제작하던 기법을 발전시켜 이룩한 그릇으로,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청자는 당시 불교의 스님들에서 유행하던 차문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중국의 청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켜 중국의 청자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청자를 만들었다. 고려청자는 강가를 중심으로 가마가 발달하였는데, 주로 경기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생산되었다. 이는 가마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풍부한 땔감이 필요하였고, 또 생산한 뒤에는 이를 배에 싣고 운반해야했기 때문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고려청자는 시대별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 중으로 고려청자의 발전사를 잘 알수있는 전시이다. 이에 전시중인 작품들을 몇 차례에 걸처 사진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오래된 한국의 사찰에 들어서면 절의 중심인 대웅전, 극락전, 대적광전, 보광전이 자리잡고 있고 이러한 건물 앞마당에는 오랜 세월동안 절의 역사와 함께한 석등이 하나쯤은 꼭 있다. 예전에는 밤이 되면 이 석등에 직접 불을 붙여 불전(佛殿)을 밝혔으나 지금은 불을 밝히던 기능은 잃어버리고 부처님이 계시는 전각을 밝힌다는 상징성의 조형물로 자리잡고 있다. 절 앞마당에 있는 석등(石燈)을 부처님의 밝은 가르침을 깨닫게 하기 위한 상징을 갖고 있다고 해서 법등(法燈)이라고도 부른다. 이 법등은 세상의 어두운 무명(어리석음)과 고통(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윤회하는 인간의 삶)속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밝고 환한 진리의 등불을 뜻한다. 석등은 언뜻보면 비슷한 듯 서로 다른 모습으로, 때로는 지극히 화려한 모습으로, 때로는 단순 소박한 형태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 왔다. 하지만 불교가 탄압을 받게 되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안타깝게도 수많은 절이 폐사되어 감에 따라 절터에 홀로 덩그마니 석등만 남아 옛 영화를 말없이 증언해주는 곳도 많다. 절에 있는 석등의 구성은 맨 아래에는 기둥과 받침역할을 하는 간주석이 있고, 그 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천사(1,004)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군에는 크고 작은 각각의 섬 마다 그 섬만의 비경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만, 그 많은 섬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널리 알려진 섬은 홍도(紅島)다. 홍도는 신안군의 여러 섬이 연육교 설치로 오고갈 수 있는데 견주어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라 오로지 목포에서 하루 2번 왕복하는 배를 타야만 가 볼 수 있는 섬이다. 자동차로 접근할 수 없어 접근이 불편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장점인 듯 최근에는 홍도의 비경을 감상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쾌속여객선을 타고 돌아보는 섬이기도 하다. 목포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은 아침 7시와 오후 1시에 출발하며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으로 홍도에 들어갔지만 이튿날 날씨가 나쁘면 속절없이 발이 묶인다. 홍도는 경사도가 심한 입지에 있는 섬으로 다른 섬들이 자동차를 싣고 들어갈 수 있는 경우와 달리 승용차는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 주차장에 주차하고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주차요금은 하루에 10,000원 정도인데, 시간에 따라서 요금이 정산된다. 홍도 여객선 비용은 편도 55,000 원이지만 홍도 주민들은 1,000원이라고 한다. 홍도는 목포에서 115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남해안은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에는 3,000여 개의 섬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전라남도 신안군에만도 1,000개가 넘는 섬들이 있는데 이를 신안군에서는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것을 쉽고 친근하게 표현하여 천사(1,004)의 신안군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옛날에는 불편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이라도 몇시간씩 배를 타고 가야만 하였으니, 군민들을 관리하는 관청에서도 행정업무에 어려움이 크고, 또 섬에 사는 주민들도 작은 일 하나 처리하고자 군청이라도 한 번 가려면 1년에 한 두번도 가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이렇게 불편한 섬살이었던 신안군의 섬들을 최근에 정부 사업으로 섬을 연결하는 대규모 다리공사를 시행하여 머나먼 섬들이 육지로 바로 연결되었다. 이로 인하여 섬들에 사는 주민들도 좋아졌지만, 육지에 사는 사람들도 섬구경을 쉽게 할 수 있게 되어 섬이라는 것이 단점이었던 신안군이 육지인들의 정신적 치유처가 되어가고 있다. 국가적 사업으로 섬을 연결하는 대 토목공사 가운데서도 압해도와 암태도 사이는 거리가 매우 멀어서 가장 어려운 공사였다. 이 대교는 2010년 7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높고 푸른 가을하늘 아래 양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풀을 뜯어서일까? 양들이 모두 포동포동 살쪄있다. 대관령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녀석들 팔자도 좋다. 넓은 초원의 울타리 안에 방목한 녀석들이 있는가하면 ‘먹이주기 체험장 안에서 관광객들이 주는 풀’을 받아먹는 녀석들도 있다. 먹이 체험장 안에 있는 녀석들도 연신 관광객이 주는 건초를 받아먹어 토실토실 살이 쪄 있긴 마찬가지다. 사람을 두려워 않고 연신 입을 내밀어 건네주는 건초를 잘도 받아먹는다. 아마도 두 그룹으로 나눠 초지에서 직접 풀을 뜯는 경우와 체험장에서 건초를 받아먹도록 조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경우나 양떼 구경을 하기 힘든 관광객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하다. ‘대관령 양떼목장’을 만든 이는 37살의 나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대관령으로 내려와 오늘의 커다란 관광 목장을 일구었다고 한다. 주인공 전영대 대표는 말한다. “1988년 여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대관령 산자락에서 대관령양떼목장이 시작되었습니다.숨가쁘게 뛰어오던 길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37살